코스타리카 커피 (산지환경, 세미워시드, 환경보호)
솔직히 저는 커피를 처음 접했을 때 산지가 뭐가 그리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그냥 맛있으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커피를 조금씩 알아가다 보니 산지 하나가 맛 전체를 결정한다는 걸 몸으로 느끼게 됐고, 그때부터 코스타리카라는 나라가 자꾸 머릿속에 걸렸습니다. 스페셜티 커피(Specialty Coffee) 시장에서 코스타리카가 왜 그렇게 자주 언급되는지, 직접 공부하면서 하나씩 검증해 봤습니다.
코스타리카 커피를 잘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 — 산지 환경
일반적으로 커피 농사가 잘 되는 나라라고 하면 브라질이나 에티오피아를 먼저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코스타리카를 들여다보면, 이 나라가 얼마나 커피 재배에 최적화된 환경인지 감탄이 나옵니다.
코스타리카는 중앙아메리카, 즉 중미 7개국 중 하나입니다. 지리적으로 북위 8도에서 11도 사이에 위치해 있고, 이 위치가 바로 커피 재배의 핵심 조건인 커피 벨트(Coffee Belt)에 정확히 들어옵니다. 커피 벨트란 남위 25도에서 북위 25도 사이의 열대 및 아열대 지역을 말하는데, 기온과 강수량이 커피나무가 자라기에 알맞은 지역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코스타리카 특유의 지형이 더해집니다. 화산 지대가 많아 토양이 미네랄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고, 고지대에 형성된 커피 농장들은 밤낮의 일교차가 커서 커피 체리가 천천히 무르익습니다. 천천히 익은 커피 체리일수록 당분과 산미가 농축되는데, 제 경험상 이런 조건에서 나온 커피는 한 모금만 마셔도 뭔가 다르다는 게 느껴집니다. 정치적으로도 중미에서 가장 안정된 나라 중 하나라 수십 년에 걸쳐 커피 산업을 일관되게 발전시켜 올 수 있었습니다. 물가가 중미에서 제일 비싸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인데, 그 물가가 오히려 품질 관리에 대한 투자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코스타리카 커피 협회(ICAFE, Instituto del Café de Costa Rica)는 커피 품질 기준을 법적으로 관리하는 기관으로, 저품질 로부스타(Robusta) 종의 재배를 국내에서 아예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에서는 아라비카(Arabica)만 재배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저는 꽤 놀랐습니다. 단순히 환경이 좋은 나라가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품질을 지켜내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93%가 선택한 방식 — 세미워시드 프로세싱
커피 가공 방식, 즉 프로세싱(Processing)은 커피 맛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입니다. 프로세싱이란 수확한 커피 체리에서 씨앗, 즉 생두(Green Bean)를 분리해 내는 과정 전체를 말합니다. 크게 내추럴(Natural), 워시드(Washed), 세미워시드(Semi-Washed) 세 가지로 나뉩니다.
코스타리카가 선택한 방식은 세미워시드입니다. 세미워시드는 화이트 허니(White Honey) 또는 화이트 워시드(White Washed)라고도 불립니다. 커피 체리에서 과육을 기계로 벗겨낸 뒤, 점액질(Mucilage)을 물로 완전히 씻어내지 않고 5~10% 정도 남긴 채로 건조하는 방식입니다. 점액질이란 커피 씨앗을 감싸고 있는 끈적한 젤 층을 말하는데, 이게 얼마나 남느냐에 따라 커피의 단맛과 발효 풍미가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 워시드 가공을 하면 클린컵(Clean Cup)이 나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클린컵이란 잡미 없이 깔끔하고 투명한 맛을 가진 커피를 말합니다. 물로 점액질을 완전히 씻어내면 그만큼 불필요한 풍미 요소가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세미워시드는 점액질을 일부 남기므로, 완전 워시드에 비해 클린컵 특성에서 다소 손해를 봅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제 경험상 코스타리카 커피를 마시다 보면 가끔 미묘하게 단맛 레이어가 깔리는 느낌이 있는데, 그게 바로 남겨진 점액질의 영향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코스타리카 전체 커피 수출량의 93~94%가 이 세미워시드 방식으로 가공된다고 합니다. 처음엔 이게 왜인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맛에서 손해를 보면서 왜 굳이 이 방식을 고집하는 걸까 싶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나서야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맛보다 환경을 — 코스타리카의 선택
워시드 프로세싱은 커피 체리에서 나오는 점액질을 물에 희석시켜 흘려보냅니다. 문제는 이 점액질이 굉장히 끈끈하고 농도가 높아서 하천에 유입될 경우 수질 오염의 심각한 원인이 된다는 점입니다. 희석도 쉽지 않습니다. 점액질 오염수를 정화하려면 막대한 양의 물과 비용이 필요합니다.
계식 점액질 제거기(Mechanical Demucilager)를 사용하는 세미워시드 방식은 이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합니다. 기계식 점액질 제거기란 롤러나 마찰 방식으로 점액질 대부분을 물 없이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장비입니다. 물 사용량 자체가 줄어드니 오염수 발생도 줄어듭니다. 코스타리카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나라인 만큼, 그 환경을 지키기 위해 커피 산업 전체가 세미워시드를 선택한 겁니다.
이 풍부한 나라임에도 물을 아끼는 방향을 선택했다는 게 저는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가공 효율이나 맛의 완성도만 따졌다면 완전 워시드를 택했을 수도 있는데, 코스타리카는 그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맛에서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환경을 지키겠다는 결정, 그것도 나라 전체 수출량의 90% 이상에서 일관되게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솔직히 감탄스럽습니다.
코스타리카의 환경 정책과 커피 산업의 연계에 대한 내용은 코스타리카 환경에너지부(MINAE)의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나라가 지속가능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잘 드러납니다.
세계 시장에서 1%도 안 되지만 — 코스타리카 커피의 위치
코스타리카 커피가 전 세계 커피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가 채 되지 않습니다. 브라질이나 베트남, 콜롬비아 같은 대규모 생산국과 비교하면 규모 면에서는 작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스페셜티 커피 시장에서 코스타리카의 위상은 그 수치와는 전혀 다릅니다.
스페셜티 커피란 미국 스페셜티 커피 협회(SCA, Specialty Coffee Association)의 기준에 따라 100점 만점 중 80점 이상을 받은 커피를 말합니다. 단순히 맛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생산지 환경부터 수확, 가공, 로스팅까지 전 과정이 추적되고 평가된 커피입니다. 코스타리카는 이 기준에서 꾸준히 높은 점수를 받아온 산지입니다.
코스타리카 커피가 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라비카 단일 품종만 법적으로 허용하여 기본 품질 기준이 높습니다.
화산 토양과 고지대 환경이 커피 체리의 당도와 산미를 높입니다.</li>
세미워시드 프로세싱으로 환경 오염을 줄이면서 안정적인 가공 품질을 유지합니다.
ICAFE를 통한 국가 차원의 품질 관리와 생산자 교육이 꾸준히 이루어집니다.
정치적 안정성 덕분에 장기적인 농업 투자와 인프라 구축이 가능합니다.
제 경험상 코스타리카 커피는 처음 마실 때 "어, 이거 생각보다 깔끔한데?" 하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미워시드의 특성상 완전 워시드보다는 살짝 더 묵직하고, 내추럴보다는 훨씬 깨끗합니다.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한 맛인데, 익숙해지면 꽤 매력적입니다. 로스팅(Roasting) 단계에서 로스터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풍미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해서, 같은 코스타리카 커피인데 다른 로스터리에서 구매한 걸 마시면 완전히 다른 커피처럼 느껴지는 경험도 했습니다.
코스타리카 커피를 알면 알수록, 이 나라가 단순히 좋은 자연환경 덕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품질 기준을 법으로 지키고, 환경을 위해 가공 방식에서 손해를 감수하고, 그럼에도 세계 스페셜티 시장에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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